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(기원전 171년 집정관)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고대 로마의 [[노빌레스]] 집안인 카시우스 씨족의 일원이다. [[파스티 카피톨리니]]에 따르면, 조부,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. [[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]]에 따르면, 기원전 178년 [[트리부누스 밀리툼]]을 맡았을 때 아르미눔(현재 리미니)에 주둔한 군단을 이끌고 이스트리아인과의 전쟁을 계획했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막대한 희생자가 양산되자 취소했다고 한다.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 간의 재임 최소 시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해 늦어도 기원전 174년에 [[법무관]]을 역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. 기원전 173년에는 갈리아와 리구리아의 땅을 로마 시민에게 분배하기 위해 결성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. 기원전 171년 [[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(기원전 171년 집정관)|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]]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. 이 시기에 [[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]]이 발발했다. 제비뽑기 결과, 크라수스가 마케도니아 전쟁을 이끌게 되었고, 그는 이탈리아에 남게 되었다. 그러나 어떻게든 군공을 세우고 싶었던 그는 아퀼레이아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그곳에서 일리리아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행진했다. 그 과정에서 로마와 전쟁 중이 아니었던 갈리아인, 카르니인, 이스트리아인, 그리고 이아피드인의 땅을 약탈했다. 그러다 마케도니아 국경에 이르렀을 때 [[원로원]]으로부터 복귀 명령을 접수받고 어쩔 수 없이 복종했다. 이후 그에게 약탈당한 부족들이 로마에 사절을 보내 항의했을 때, 이미 임기가 만료되었던 그는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마케도니아에 투입된 로마군에 배속되었다. 원로원은 사절들에게 그가 부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책임을 물 수 없다고 답했다. 그 후 카시우스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발칸 반도에 남아 있었고, 기원전 168년 법무관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의 지시에 따라 포로로 잡힌 [[일리리아 왕국(고대)|일리리아 왕국]]의 국왕 [[겐티오스]]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. 기원전 15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와 함께 [[감찰관]]에 선임되었다. 그들은 영구적인 석조 극장 건설하려 했지만, 영향력 있는 귀족인 [[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]]이 "공중 도덕에 쓸모없고 해로운 건물"이라며 반대했다. 리비우스에 따르면,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건설 중인 건물을 철거하기로 했다고 한다. [[파울루스 오로시우스]]에 따르면, 건설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. 일부 학자들은 이 일은 기원전 125년에 벌어졌으며, 여기서 등장하는 카시우스는 그가 아니라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라고 추정한다. 아들 [[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(기원전 124년 집정관)|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]]는 기원전 12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.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27년 집정관이며 기원전 125년 감찰관인 [[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]]도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,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64년 집정관인 [[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(기원전 164년 집정관)|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]]의 아들이라고 추정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